한국 개그계의 큰 별이자 방송사와 후배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남긴 전유성이 7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69년 TBC 방송작가로 데뷔해 ‘개그맨’이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그는 50여 년간 대한민국 예능사의 중심에 서며 수많은 후배들을 길러냈다. 폐기종 악화로 세상을 떠난 그는 생전에 끊임없이 새로운 개그 형식을 도입하고 개그맨들의 무대를 확장시킨 개척자였다. 이번 글에서는 전유성의 삶과 업적, 그리고 그가 한국 예능계에 남긴 의미를 되짚어본다.
생애와 데뷔 과정
전유성은 1949년생으로, 1969년 TBC의 ‘쑥쑥쑥’ 방송 작가로 데뷔하며 방송계에 발을 들였다. 당시 방송 코미디는 미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희극인’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쓰였다. 전유성은 그 시절 새로운 흐름을 제안하며 ‘개그맨’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해, 이후 한국 코미디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방송과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채워져 있었다. 전통적인 희극의 형식에서 벗어나 시대와 대중의 변화를 읽고 이를 무대에 녹여내려는 노력이 그를 남들과 차별화시켰다.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방송계에 뛰어든 그는 단순히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형식과 언어, 무대 연출을 적극적으로 실험하며 당시 보수적인 방송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60~70년대는 한국 사회가 산업화로 급격히 변하던 시기였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무겁고 진지했음에도, 전유성은 웃음의 힘을 신뢰했다. 그는 “웃음은 가장 강력한 사회적 에너지”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훗날 수많은 코미디 프로그램과 개그맨 양성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방송 활동과 업적
전유성의 방송 활동은 1970~80년대를 거쳐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는 단순한 개그맨이 아니라 기획자, 연출가, 교육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쇼비디오자키’, ‘유머 1번지’, ‘폭소클럽’ 등 굵직한 코미디 프로그램들의 형성과정에서 그의 아이디어와 연출 철학이 녹아 있었다. 특히 ‘개그맨’이라는 개념을 확립시킨 점은 전유성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힌다. 단순히 웃음을 주는 연기자가 아니라, 사회를 풍자하고 대중과 호흡하는 창작자로서의 개그맨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다. 이는 후배들이 예능계 전반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는 기반이 되었다. 1980년대 이후 그는 방송뿐 아니라 무대 코미디와 지역 축제까지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2013년부터는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명예위원장으로서 해외 코미디 문화를 국내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한국 개그를 세계 무대와 연결하는 중요한 가교 역할이었다. 2019년에는 데뷔 50주년을 맞아 전국 투어 공연을 펼치며 “개그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당시 공연은 단순한 추억 회상이 아닌, 새로운 세대 개그맨들과의 협업 무대였다. 그는 끊임없이 세대 간 교류를 강조하며 “개그는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철학을 보여주었다.
개그계에 남긴 유산과 후배들의 추모
전유성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바로 후배 양성이다. 그는 김미화, 이경규, 김국진, 김용만, 조세호 등 수많은 개그맨들의 멘토 역할을 해왔다. 단순히 방송 기회를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공연 무대와 아이디어 실험의 장을 열어주어 후배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개그의 다양성’이었다. 특정한 유행 개그에 매몰되지 않고, 각자의 개성과 장점을 살려 무대를 만들라는 그의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많은 개그맨들이 인용하는 조언이다. 후배 개그맨들은 그의 별세 소식에 깊은 슬픔을 표하며 “개그계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후배와 방송 관계자들이 조문을 왔으며, 빈소에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문구가 빼곡히 채워졌다. 이는 전유성이 단순한 방송인이 아니라 한국 예능계 전반의 정신적 지주였음을 보여준다.
개인사와 알려진 뒷이야기
전유성의 삶에는 방송 밖의 다양한 이야기도 존재한다. 그는 9살 연하의 가수 진미령과 1993년 결혼했으나, 2011년 이혼 소식이 전해졌다. 혼인신고는 하지 않아 법적 부부 관계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랫동안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사생활보다는 늘 무대와 후배 양성에 집중했으며, 대중 앞에서 과장된 삶을 보여주기보다 진솔하고 겸손한 태도로 살아왔다. 방송이 아닌 자리에서는 ‘차분한 성격의 예술인’으로 기억된다는 후배들의 증언이 많다.
병환과 별세 소식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에 따르면 전유성은 최근 폐기종 악화로 전북대학교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폐기종은 폐의 공기주머니에 구멍이 생겨 정상적인 호흡이 어려워지는 질환이다. 지난 7월 그는 기흉 수술을 받았지만, 양쪽 폐 모두에 기흉이 발생해 치료가 쉽지 않았다. 결국 상태가 악화되며 2025년 9월 25일 오후 9시 5분경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였다.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흑백 사진 속 환한 미소의 전유성이 걸려 있었으며, 후배와 방송 관계자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장례식장에는 꽃과 조화가 가득 차 그의 인생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빛을 전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대중과 업계 반응, 앞으로의 의미
대중들은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내 어린 시절의 웃음을 책임진 분”, “한국 개그의 뿌리 같은 존재였다”라는 추모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특히 개그맨이라는 직업을 자랑스럽게 만든 인물로서, 전유성이 남긴 영향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방송 업계 관계자들은 그의 부재가 한국 예능계에 큰 공백을 남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철학과 가르침은 후배들을 통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전하고 있다.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측 역시 “선생님의 뜻을 이어 한국 코미디를 세계에 알리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전유성은 단순히 웃음을 주는 방송인이 아니라, 한국 개그 문화의 기틀을 세운 창조적 개척자였다. 그의 생애는 늘 새로운 길을 열고 후배들에게 무대를 내어주는 여정이었다. 비록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철학과 정신은 한국 코미디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업적을 기억하며, 웃음의 힘을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